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午後世評

주역 : 뇌화풍의 시대

by 연학 2025. 8. 19.

뇌화풍 - 象曰 雷電皆至 豐이니 君子 以하야 折獄致刑 한다...

 

뇌화풍: 풍요의 절정에 심어진 결핍의 씨앗

나는 아마도 뇌화풍(雷火)의 시대에 살았다. 하늘에는 번개가 치고, 태양은 빛나며, 곡식은 그득해 보였다. 창고는 가득 찼고, 신문에는성장이라는 두 글자가 매일같이 실렸다. 겉으로는 풍요로웠으나, 그 속에선 뭔가 어긋난 소리가 났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과 사회에서정신의 향기가 사라졌다.

전후의 황폐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라는 숨 가쁘게 달려왔다. 고아들을 해외로 보냈고, 광부와 간호조무사들을 외국에 파견했다. 군인은 월남전에 참전했고, 노동자는 중동의 사막 건설현장에 흩어졌다. 달러가 들어왔고, 강남 땅값은 치솟았다.

이 과정은 주역의 뇌택귀매(雷澤歸妹)와 닮았다. 귀매는 정상 순서가 뒤집힌 결합, 때를 맞추기 위해 급히 맺어진 만남이다. 서괘전은 귀매 다음에 풍()을 둔다. 잘못된 결합이 곧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초기에 풍성함이 찾아온다. 우리도 그랬다. 너무 배가 고팠고, 시간이 없었다. 정경유착이 생겼고, 누군가는 희생되었다. 그러나 숨통은 트였고, 기업은 성장했다. 사람들은 의심 속에서도 매일같이 들려오는 성장의 소식에 환호했다. 하지만 그 풍성함은 기초가 약했다. 귀매의 그림자는 이미 풍의 빛 속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풍의 시대. 그것이 70년대부터였을까? 뇌화풍의 여섯 효는 내가 살아온 시대의 다큐멘터리 같다.

 

初九는 遇其配主호대 雖旬이나 无咎하니 往하면 有尙이리라. 象曰 雖旬无咎니 過旬이면 災也리라.


불완전했지만 필연적인 전후의 파트너십. 미국이 없었다면, 그 누군가가 없었다면, 그 시절을 그렇게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까?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든 파트너와 줄을 잡아 사업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기회가 되었다.

 

六二는 豊其蔀라. 日中見斗니 往하면 得疑疾하리니 有孚發若하면 吉하리라. 象曰 有孚發若은 信以發志也라.


태양은 떠 있었으나 장막 아래 의심이 깊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이거 이상하다고. 그런데, 듣는 이가 없었다. 권위주의의 그늘 속에서 몇몇은 먼저 비명을 질렀지만, 절박한 대중은 듣지 못했다. 눈과 귀가 막혀 있던 사회에서, 억지로 봉합이 이어졌고, “이거 되는 거야라는 말이 사람들을 버티게 했다.

 

九三은 其沛라. 日中見沬오 折其右肱이니 无咎니라. 象曰 其沛라 不可大事也오 折其右肱이라 終不可用也라.


성장은 한쪽 팔을 희생하며 이루어졌다. 또 한 번 군부가 들어섰고, 여전히 성장하던 사회에선 비효율이 축적됐다. 초창기의 산업군은 경쟁력을 잃고 무너졌다. 그들이 성장해온 과거의 방식에 취했던 것이다. 이것은 90년대말 IMF로 이어졌다.

 

九四는 豊其蔀라. 日中見斗니 遇其夷主하면 吉하리라. 象曰 豊其蔀는 位不當也일새오 日中見斗는 幽不明也일새오 遇其夷主는 吉行也라.


외국 자본이 기회를 주었으나 주도권은 밖에 있었다. IMF 위기는 왔지만 한국은 빠른 구조조정과 IT 산업의 성장으로 버텼다. 하지만 우리는 더 잘해냈고, 다시 일어섰다. 그것이 정말 좋은 변화였을까 하는 질문은 남았다. 후유증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각자 도생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六五는 來章이면 有慶譽하야 吉하리라. 象曰 六五之吉은 有慶也라.


2000
년대 초, 우리는 세계 최고의 조선·반도체·휴대폰·자동차 산업을 가졌다. 2010년대가 넘어선, 한국을 무시하던 세계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고, 모두가 한국“K-Something”에 환호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출산율은 급감했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가 되었다. 돈이 삶의 최우선 가치가 된 사회. 젊은 세대는모두를 위한 희생대신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좇았다. 대도시와 지방의 격차는 벌어지고, 폐교와 빈집이 늘었다. 결혼과 출산은 부담이 되었고, 사회 안전망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데만 힘을 썼다. 풍요 뒤에서사람이 사라지는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 모르겠다. 그런데, 여전히 비슷한 장면을 접한다. “매출이 없으면 사람도 지킬 수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매출이 있는데 사람을 지키지 않으면”, 다시 매출이 생길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上六은 其屋하고 蔀其家라. 闚其戶하니 闃其无人하야 三歲라도 不覿이로소니 凶하니라. 象曰 其屋은 天際翔也오 闚其戶闃其无人은 自藏也라.


마지막에는 사람 없는 풍요가 남았다. 저출산은 red line을 넘었고, 인구 구조는 급격히 뒤틀렸다. 지방은 붕괴되고, 수도권에도 빈 건물이 늘었다. 공동체가 해체된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뇌화풍은 거대한 연회와 같았다. 최고의 파티를 마련했지만, 초대장은 소수가 쥐고 있었다. 문턱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발길을 돌렸다. 음식과 장식은 남았으나 웃음과 대화는 사라졌다.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으나, 먹을 사람은 없었다.

()의 다음 괘는 화산려(火山旅). 절정에 머물 수 없을 때, 사람은 떠난다. 려는 방랑, 거처 없음, 그리고 모험이다. 누군가는 헬조선을 떠나 짐을 챙기고, 인재는 유출되며, 곳간은 비어간다. 남은 이들도 쉽지 않다. 그러나 외로움 속에서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모든 시작은 귀매였다. 풍요의 절정은 이미 끝의 씨앗을 품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자라는 모습을 모른 채 살아왔다.

 

에필로그


그래서 지금의 K-시대가 불안하다. 내실은 비어가는데, 사람들은 화려한 거품 속에서 취해 있다. 진짜배기들은 근거를 해외로 옮기고, 젊은 층과 미래의 꿈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한국은 뇌화풍에서 화산려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 좋을지 나쁠지는 모른다. 화려했지만, 사람이 사라진 시대를 살았다. 이제 나는 화산려의 길 위에 서 있다. 그것이 노년의 외로움일지, 새로운 길을 찾는 외로움일지 알 수 없지만, 그 길 끝에 작은 희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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