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참 빨리 흘러갑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공전하는 데 드는 시간을 인간이 느끼기에, 1살 때에 1로 느낀다면, 두 살 때엔 1/2, 열 살 때엔 1/10으로 지나가는 듯 합니다. 마흔 일곱이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1/47 정도가 되겠지요. 열 살 때보다는 거의 다섯배의 속도로 지나가는 것이겠지요. 더 많이 알아서일 지, 더 많은 관계나, 챙겨야할 일, 해야 할 일이 늘어나서 일지요? 반대로 그 시간의 모든 순간을 향유할 수 없을만큼 점차 감각과 이성이 둔해지고 노화되기 때문일 지요? 몇 해 전만 해도 노안이 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노안을 호소해도 당연한 나이가 되어 있네요.
노안을 생각할 때면, 파우스트의 2막에 "근심"이 파우스트에게 찾아오는 장면을 종종 생각합니다.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또 한 번의 인생을 살게 된 파우스트가 욕망에 따른 삶을 살고 어느덧 노년이 되었고, "결핍", "죄악", "곤궁", 그리고 "근심"의 네 자매가 저 멀리 그들의 오빠 "죽음"에 앞서 찾아옵니다. 다만, 부자인 파우스트에게는 다 소용이 없고, "근심"만이 스며들어옵니다. "근심"이 저주를 남겨 놓으면, 사람이 이루어낸 모든 것을 즐길 수 없게 만들고, 미래에만 집착하여 오늘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생기를 빼앗긴 사람은 짜증과 불쾌만 가득한 채, 죽음을 기다리게 됩니다. "근심'은 파우스트에게 입김을 뿜어 장님을 만들어 놓고 사라집니다.
십수년전 눈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두어달 가량 일도 못하고 답답하게 살아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막막한 시야만큼이나, 생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과 몸이 쉬고 있으면서도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지내야 했습니다. 한 눈이 불편하니, 책도 제대로 보기 어렵고, 나을 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대책도 세우기 어렵고, 몸이야 쉬는 기간 여러가지 기력 보충 한다고 하지만, 정작 마음은 그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리보면, 이제 몸의 기능들이 슬슬 떨어져 가기 시작하면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생각하고 읽을 수 있고, 사람들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것들에 감사하기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감사할 일이, 어느 노랫말처럼 '별 일 없이 사는' 것이 아니겠나 하는 것을, 이 나이가 되며 점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신부님의 감사 기도에 있는 다음 구절이 매번 마음에 꽂힙니다.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음을 감사하게 하소서.1)
시간이 갈 수록, 굳이 행복이라는 것을 "기분이 신나게 좋은 상태", "무엇을 이룬 상태"라고 정의할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이 스스로 조절하는 범위 내로 변화폭이 줄어들고, 그래서 심리적,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편안합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라든가,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별다른 대사도, 스토리도 없는 것을 보며 뇌를 쉬곤 합니다. 또 시간이 나면 바둑 영상을 찾아보거나, 저녁을 먹는 것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코로나와 함께 우울과 불안의 시대가 계속되는 가운데, 법륜 스님2)이 어느 강연에서 좌절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질문자에게 신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소개하여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몸을 최대한 낮춰 절을 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저는 주님의 은혜로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절은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며, 몸을 최대한 낮추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요소임.
불자가 아니면 하느님에게 기도하면 됨.)
신에게 굳이 '편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도 아니고, 내가 편안한 상태였다는 것을 계속해서 자각하고 기억하는 습관이 들면, 심리적으로도 불안함이 줄어들고, 편안해진 마음에 새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또 힘이 생겨 하루를 살 수 있겠지요.
'아름다운 과거를 뒤에 두고, 뜨거운 현재를 살아서, 빛나는 미래를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에 가득차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은 이미 스물 여덟 번째의 봄을 맞이 하였습니다. 무모함으로, 때론 힘빠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정표를 지나갔습니다. 이번엔 편안하게, 편안하게, 편안하게 지나가고 싶네요. 그리고는, 근심으로 눈이 멀어버린 파우스트가, "밤은 깊어가지만 마음 속에서 빛나는 밝은 빛"을 보고 "생각했던 바를 서둘러 완성하러3)" 가듯이, 또 일어서서 하루를 보내 보아야지요.
그 모든 과정과 시간에 감사합니다.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주 > ------
1) 이철 신부가 드리는 희망의 선물
2) https://ko.wikipedia.org/wiki/%EB%B2%95%EB%A5%9C_(%EC%8A%B9%EB%A0%A4)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인웅 역, <<파우스트>>, 14판,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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