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려고 누워서, 오랜만에 음악을 틀었습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 이 곡의 1악장을 들을 때마다, 저는 초등학교 5~6학년쯤의 어느 초여름 날 오후를 떠올립니다. 무엇인가 흥미 있는 것을 찾는 호기심 어린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 창밖은 신록이 깔려 있고, 당장 소나기라도 올 듯한 날씨입니다. 선풍기의 바람을 쐬며, 세상 없는 평화로움과 꿈꾸는 듯한 두근거림이 느껴집니다.
비슷하게 무언가를 생각나게 하는 피아노협주곡이 몇 곡 더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 1악장은 높은 바위 언덕을 올라가는 지친 사람의 절망감이 느껴지고, 2악장은 가을 저녁 남들 아무도 모르는 숲 속 호숫가에서 밤새 추억을 되새기는 영혼을 떠올립니다. 쇼팽의 협주곡 1번의 2악장은 닿을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는 어느 장년의 신사가 파리의 까페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강을 바라보는 모습이 떠오르고, 라벨의 협주곡 2악장은 끝도 없는 안개를 무작정 걷는 몽환의 느낌이 가득합니다. 갑작스레 이 모든 음악을 동시에 듣고 싶어졌다가, 내가 한 곡밖에는 듣고 있을 수 없음에 살짝 좌절감마저 느껴졌네요.
음악과 미술은 사람들에게 뚜렷한 감정과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다른 예술 장르입니다. 음악은 청각적 경험을 생성하는 시간 기반 예술 형식인 반면, 회화 및 조각과 같은 순수 예술은 정적 이미지 또는 개체를 생성하는 시각 예술 형식입니다. 두 가지 형태의 예술은 보는 사람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이동시키는 능력과 경험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음악은 순간적으로 경험됩니다. 청자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면서, 연주자가 풀어놓는 다른 장소나 시간으로 영혼을 이동시킵니다. 라이브 무대의 경우에는 그러한 몰입감이 극대화하기도 합니다. 귀에 꼽아 두고 듣는 음악보다 더 현재에, 지금의 연주에 집중하게 됩니다. 음악을 떠난 다른 곳에 내 생각이 머무르는 순간, 나는 음악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을 듣는 나 자신은 현재의 괴로운 순간으로부터 어딘가로 도피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머릿속에 스토리가 그려지는 음악이라면, 음악의 흐름을 나의 노래로 이해하며 따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몇몇 "인생의 곡" 이고, 많은 곡들은 실상 몇 번의 감상으로 우리와 이 생의 인연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는 회화나 조각 같은 미술 작품에도 끌림이 생깁니다. 작품은 "동시적" 으로 많은 메시지를 뿜어 냅니다. 또한 미술작품은 정적이기에, 시간을 들여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내가 정하기 나름이고, 나는 내가 가진 수많은 상념을 녹여 내어 작품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해석이나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도 있고, 잠시 내가 가진 일상과 사업의 고민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산만하게 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현실 어딘가에 있게끔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점에선 지금의 괴로움에서 도피하기보다, 그 많은 괴로움을 내 마음에서 직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겠습니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일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림을 보면서의 몰입감도 음악만큼 다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정서적 영향 측면에서 음악과 미술은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음악은 종종 기쁨, 슬픔 또는 흥분과 같은 다양한 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양되거나 진정될 수도 있고, 시간을 따라 기다려야만 작품이 주는 클라이막스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미술은 종종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보는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과 해석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시가 주는 상상과 여백의 미를 볼 때 미술에 더 가까이 있지 않나, 그래서 미술은 더 시와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물론 시를 음악적 영감으로 써낸 이들도 있고, 음악이나 미술을 음악으로 풀어낸 이도 있으니, 뭔가를 단정지어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은 예술이나 문학을 대함에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흐릿한 그 경계 어딘가에 새로운 예술의 차원이 존재할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러한 "특별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딘가에 우리를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살면서 꼭 챙겨갈 '이승의 보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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