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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 Time Talk

공감각적 무대 - 소프라노 백준영 리사이틀 후기

by 연학 2025. 9. 23.

소프라노 백준영 리사이틀 후기
(2025.09.25)

백준영의 청량한 고음을 무척 좋아한다. 그녀의 노래는 평범한 소리에서 시작하지만, 나같은 막귀에게도 어느 순간 뇌가 깨끗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몇 초를 만드는 서사는 사석에서 보이는 그녀의 명랑함과 밝음에 대조되는 깊이가 있다. 이번 리사이틀은 그 모든 디테일에 오랜시간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머리로 이해하고, 귀를 울리고, 마음을 열게 만든 연주였다.

"프로젝트 경성"은, 클래식, 재즈, 국악인이 함께 하는 음악 모임이다. "경성"은 식민 통치 시기의 우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서양의 고전과 현대 문물이 동시에 뒤섞인 공간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그 정서가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같은 시대의 다른 세계와 연결됨에 초점을 맞춘다. 바흐-드뷔시-피아졸라의 곡으로 이어지는 1부와와 그리고 "프로젝트 경성"의 음악으로 채워지는 2부는 이 관점에서 매우 정교하게 연결지어 구성되었다.

바흐의 정제됨과, 피아졸라의 광기, 현실성은 워낙 강렬한 대비를 이루지만, 이 둘의 연결 고리가 많은 연주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피아졸라 본인이 바흐를 워낙 존경한 탓에 자신의 음악 세계에 바흐의 기법을 많이 접목시켰고, 반도네온과 결합시킨 바흐 곡의 연주를 스스로 즐기기도 했다. 연주가들도 바흐와 피아졸라의 레파토리를 통한 공연이나 프로젝트를 종종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공연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중간에 배치된 "드뷔시"였다. 이것은 바흐와 피아졸라를 바로 대응시키기보다는 "인상주의"라는 완충지대를 두어 양극이 접점에서 스며들며 뒤섞이는 효과를 노렸다고 생각된다. 드뷔시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인상주의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의 경계를 확장하였는데, 말라르메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나, 발레리의 시 "달빛"을 음악으로 옮긴 유명한 피아노곡 "달빛"으로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을 표현했다. 공연에서는 드뷔시의 "오래된 가곡" 중 네 곡이 연주되었는데, 그 구성에도 고전과 현대의 조화가 돋보인다. 고결한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파르나스파" 시인인 피에르 드 방빌의 시와 당대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느의 시를 두 곡 씩 배치하여 접점에서의 양극의 조화를 다룬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여기에 프랑스인들에게 익숙한 동요인 "Au clair de la lune"의 주제와 소재를 차용한 "Pierrot"에서 이러한 결합이 단순히 물리적인 병치를 넘어 화학적인 결합으로 이어짐을 보여주었다.

예술의 장르간 경계 허물기, 극과 극의 대비와 화해라는 큰 틀을 통해 세계를 보는 시도는 무대 구성에서도 드러났다. 무대 뒤 화면에 비쳐진 그림들은 모두 섬세하게 연주곡과 연결되어 있었다. 클림트나 고흐, 샤갈, 피카소, 신윤복의 그림, 그리고 세밀하게 선택된 시, 그리고 피아노, 반도네온, 해금, 거문고, 정가가 함께하여, 소위 "공감각적 경험"을 극대화하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 졌다. 내 연배의 분들은 익히 들어보았을 단어, "공감각적 심상"의 한국 현대시들이 떠올랐다. 김광균의 '외인촌'이나 '추일서정'이 주는 "회화적이며 주지적인" 느낌이 무대에 고스란히 살아 전달되었다.

연주회의 형식 또한 파격적이었다. 리스트의 살롱 연주처럼 대화와 설명이 곁들여졌다. 단순히 곡을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과의 대화 속에서 무대는 완성되었다. 관객의 추임새를 유도한 부분이나, 고마운 분들을 일일히 소개하며 함께한 것은 예술을 ‘보여주는 것’에서 ‘함께 짓는 것’으로 바꾼 시도였다. 이유화 피아니스트의 말처럼 "AI 시대에 사람의 숨결이 살아 있게 하고픈" 연주회의 의미가 느껴졌으며, 한국 공연의 무대 연출이 이제는 글로벌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에 일조를 한 무대였다.

프로젝트 경성의 곡으로 꾸며진 2부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예술적 융합의 조명"하에 어떻게 비추어 질 수 있는 지를 탐구한다. 첫사랑의 설렘에서부터 헤어짐에 이르기까지의 각 순간을 담은 전반부 '세 곡의 모던 가락' - "첫사랑가", "가감승제", "하얀거짓말"이 소개되었다. 이어서, 1부의 주제인 바흐, 드뷔시, 피아졸라의 풍의 오마쥬 무대로 각기 한우와 임제, 황진이의 시조에 곡을 붙인 작품이 선보였다. 모두 프로젝트 경성의 음악감독이자, 피아니스트인 이유화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곡들이다. 특히 국악의 정가와 소프라노의 음색이 결합되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진 보편성을 전달하는 듯 하였고, '하얀 거짓말'에서는 보낼 수 없는 속마음과, 겉으로 내는 표현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냈다.

마지막 레퍼토리인 "망각"은 안동의 이응태묘에서 출토된 부인의 편지에서 모티브를 얻은 내용으로, 백준영 본인이 직접 시를 썼다. 죽은 남편을 그리는 청상의 노래와 배경에 비춰진 그림 "오펠리아의 죽음"이 맞물렸다. 이 무대 전체를 관통하는 듯했는데, 19세기~20세기 초 삶의 연민과 애절함, 전쟁기 어린이의 사진과 함께, 사랑과 행복 순간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어우르는 삶과, 그 배경으로서의 죽음과 망각이 대비되는 효과를 만들었다. 망각과 기억의 긴장이 하나의 점에서 만났고, 무대의 구성과, 소리, 그림, 시가 그 점에서 통합되며 공연은 정점을 찍었다.

한 줄로 요약컨대, “음악과 시, 회화를 아우르며 극과 극의 감정을 교차시킨 공감각적 예술무대"에서 "사랑과 기억, 그리고 망각에 대한 인문적 탐구”가 이루어졌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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