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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 Time Talk

나이 50이 되어 부인해야 할 것들

by 연학 2025. 10. 19.

나이 50이 되어 부인해야 할 것들 (2025.10.19)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믿고, 또 버린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 선생님이자, 유명한 희곡 작가셨던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10대에 니체에 빠지고, 20대에 마르크스에 빠지고, 30대에 이 둘을 다 부인하지 못하면 지식인이 아니다"했다. 당시에는 그저 현학적인 말씀으로만 들렸던 이 구절이, 이제 50을 맞으며 새롭게 느껴진다.  
20대의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심취했다. 온라인상의 닉네임도 '파우스트'였다.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며 영혼까지 거래하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당시 지적 탐구에 목마른 젊은이에게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서재 장면에서의 인생에 대한 허무와 절망의 외침과, 그래서 끝없이 욕망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이 바로 나였다. 지금 돌이켜, 파우스트의 비극은 어쩌면 '스스로를 부인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일 지도.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앞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뒤돌아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50이란 나이는 바로 그 '뒤돌아봄'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가 그토록 확신했던 것들, 한때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나이.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다. 베드로의 부인은 오히려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 역시 끊임없이 자신의 일부를 부인하고 변화해 온 이들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성공이란 끊임없이 자기 아닌 것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검인 것이,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나 거짓말쟁이라 비난받는 정치인들 역시, 나름의 철학과 딜레마 속에서 산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지적했듯, 악은 때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지 못하고, 부인해야 할 것을 끝까지 부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회사 같은 곳에서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중성을 띠도록 요구받는다. 자신의 신념과 다르게, "조직으로서의 신념도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게 생존의 법칙이고, 조직의 법칙"이라고 애써 외면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를 '부정직성'(mauvaise foi)이라 불렀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간다. 언제까지 수많은 가면 속에서 살 것인가? 진정한 얼굴은 없는가? 하다못해 가면이 몸과 하나가 되었다면, 그 중에 가장 진실된 가면은 무엇인가? 50이란 나이는 이러한 자기기만을 더 이상 허용해선 안된다 본다. 부인해야 할 것을 부인하지 못할 때 닥쳐오는 자기 모순을 자각하는 것이 진짜 지옥이다. 토인비는 "문명의 붕괴는 창조적 소수가 단순한 모방자로 전락할 때 시작된다"고 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남을 모방해야 할 것이 아니다. 게다가, 50대에 이르러 과거의 자신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바로 "부인"해야 할 시기라는 뜻이다. 절대적 권위나 진리도 의심하고 부인할 용기를 가지면서, 그것이 스스로에게도 향해야 한다. 그것이 초월을 향한 방법이다.

중국 고전 '주역'의 각괘 6효사에는 "후회하리라(悔)"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변화의 시기를 놓쳤을 때 찾아오는 성찰이다. 노자 역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고 했다. 50의 나이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직하게 구분하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과감히 부인하는 것. 야스퍼스는 "진리는 소통 속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부인해야 할 것은 어쩌면 우리의 고집스러운 확신들이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진리가 얼마나 상대적인지, 우리의 신념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종종 깨닫게 되지 않던가?

  
스스로를 부정해 나가는 가운데에서, 결국 흔들리지 않는 진짜가 나타난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정하는 가운데, 부러지지 않는 갈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을 스치는 바람이 보인다. 공자도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확립했으며,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다"고 했다. '쉰에 천명을 알았다'는 것이 결국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닐 것 같다. 진정으로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랄까.

동양의 선사들은 "고요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봄이 오고 풀이 자란다"고 했다. 50대는 어쩌면 이런 자연스러운 부정과 긍정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무리하게 버리려 하거나, 완고하게 붙잡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때가 되면 버려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고, 지켜야 할 것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늦은 것도 아니고, 빠를 것도 아니고. 적절한 시간이 있을 것도 아니다.
결국 50이 되어 부인해야 할 가장 큰 것은 교만함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 이미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것들, 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러한 교만함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새로운 봄이 찾아올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를 망각한 시대"를 살다가, 존재의 본질을 다시 묻고 찾아가는 시간이 바로 50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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