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풍경화
Claude Monet, Coquelicots, 1873, Oil on Canvas, Musee d'Orsay
나를 처음 서양 미술의 세계로 인도한 그림입니다. 서양 미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서점 한 켠에서 사온 프린트 한 장이 그 시작이었네요. (작가의) 부인과 아들로 추정되는 모자가 개양귀비 꽃이 핀 들판으로 산책을 가는 장면입니다. 시골 생활을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나름 낯설고 평화로운 풍경에 매료되었습니다. 1996년 오르세 미술관에서 처음 접했을 땐 오랫동안 동경하던 팝스타를 만난 느낌으로 벅차 올랐었네요. 이후로 모네라는 이름에 매료되어 참 오랜 세월 그의 팬으로 살았습니다.
Claude Monet, The waterlily pond (Nympheas), 1899, oil on canvas, Musee d'Orsay
그리고 빠져든 모네의 정원, 수련, 일본식 다리 그림들. 1996년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이 그림이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 갔습니다.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니스에서도, 나중에 시카고와, 뉴욕에서도 그의 수련이 있으면 발품을 팔았습니다. 저 스스로 모네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고 있을 정도로 정말 많은 작품을 보러 다녔고, 책도 많이 사 보았군요. 인상주의 작품에 대해서는 나름 자신이 있어요. 모네의 그림은 사실, 다른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색채도 그렇고, 예쁘고 잘 그렸다는 느낌을 많이 줍니다. 물론 지베르니가 워낙 아름다운 풍광의 동네입니다만, 이를 모네가 가장 잘 표현해 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베르니에 가 보면, 사실 그 원본이 되는 다리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원래 그림에 비해서는 약간 낮은 모습으로 보수가 되어 있지만요. 2006년에 실제 방문을 했었는데, 이 지역의 풍광은 그 자체로 그림입니다. 봄철의 강변이며, 정원이며, 꽃에 이르기까지, 지베르니에 한 번 다녀오면, 당분간 그림을 보고 싶어지지 않아지니까요.
Claude Monet, Japanese Footbradge, 1920-22, oil on canvas, MoMA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약해진 모네는 이와 같이 추상에 가까운 그림으로 다리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색채와 형태의 붕괴와 함께, 표현주의나 근대 추상미술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사물에 원래의 색이 있다고 보지 않고, 시시각각 빛에 따라 변화하는 색을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인상주의(Impressionism)로부터, 마음의 표현(Expression)으로서의 색채가 그려졌다고 할까나요. 이런 흐름이 초기의 칸딘스키 작품에서처럼 빨간 하늘, 보라색 나무, 파란색 길 등으로 표현되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에 회화의 모든 구성요소가 하나씩 차례로 무너져간 것이 현대 미술의 사조가 아니었을까도 싶고요.
오랑제리 미술관의 수련 벽화 전시실
파리 오랑제리 미술관에는 모네의 대형 수련 그림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100년쯤 전의 대형 LED 스크린이라고 해야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입이 벌어지는 사이즈도 사이즈지만, 이곳에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모네의 정원 수련이 그에게 도가적 성찰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모네가 그린 물의 그림자로 보이는 하늘의 모습을 보면, 하늘에 연꽃이 떠 있는 듯도 하고, 연못에 구름이 떠 있는 듯도 하여, 서로 이어질 수 없는 것들이 하나로 결합된 느낌을 줍니다. 장자의 호접몽 고사와 같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를 듯 하여, 잠시나마 서양의 문을 통해 동양의 정신을 엿보는 듯 합니다.
Juan Miro, Paysages, 1976, Acrylic and wax crayon on canvas,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
2005년 유럽 여행 당시, 친숙해진 미로의 그림으로, 매우 단순하지만, 구도와 여백이 주는 미에 푹 빠져버리게 한 작품입니다. 워낙 상징적인 암시를 그림 속에 심어두는 작가의 성향이 있으나,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심하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네요. 머리가 복잡해서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도, 지금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아름다운 바둑의 포석을 보는 것도 같고, 들판의 풍경을 보는 듯도 하고, 인간사의 복잡한 아픔을 신의 경지에서 바라보는 듯도 합니다. 마드리드에 들를 때면, 시간이 없어도 잠시 택시 타고 들러 꼭 한번 보고 옵니다. 화면이 모두 비어있는 듯 하지만, 어느 한 구석에서 비어 있는 느낌을 찾을 수가 없네요.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는, 여행을 가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할 기회가 줄어들다 보니, 새로운 '인생 그림'을 찾아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포스팅이라도 해 보겠다고 그림을 다시 찾으면서, 마음의 많은 위안과 치유가 됩니다. 그림, 예술의 힘이라는 것을 이제서 또 이렇게 체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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