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두려워 할 줄 안다는 것 (2011.1.10)
'열심인, 혹은 독실한' 신자라고 할 수는 없는 나도 가끔은 성경을 뒤적여 볼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디서 들었던
것은 있어서 살다가 그 구절이 갑자기 그리워 질 때가 그렇습니다. 요새는 검색 기술이 좋아서, 기억나는 구절을 입력하기만 해도, 그 구절이 어느
책의 몇 장에 있는 것인지 다 알 수 있어 편리합니다. 게다가 필요하면 쉽게 원문으로도 접할 수 있습니다.
어느 책이건, 그 책에 기술된 '착한 사람'은 보통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기록된 듯 합니다. 옛날
어디에 누가 살았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식이죠. 물론 그 사람은 당연히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느님이 정해준 룰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듯 하다. 교회 잘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고, 나쁜 짓 안하면
그런 사람이라고. 뭐 굳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2% 부족한 느낌. 굳이 다른 데 돌아볼 것 없이 내가 열심히 살면 되고, 수도승처럼
죄짓지 않고 살면 되는 그런 식의 계율이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나아가서는 세상에서 조금
더 많은 성공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어느새부터인가, 삶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신이 어디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때부터였을
듯 합니다. 세속적인 성공이 굳이 '하느님의 뜻'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 정도를 알고 놀랄 것은 없었던 것 같고, 정작의 관심은 내가 그렇게
관계를 맺어야 할 '신'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을 테지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묻듯이, '선생님 어디 사십니까?' 하는
질문이 주 관심사였습니다. 굳이 인간계에 몸담지 않아도 될 신이 아니었던가요.
굳이 크리스트교의 틀에 박혀있지 않고, 유신론과 무신론이 모두 모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중간점에서 이야기 하자면, 인간에게 신은 '인간이 이루어 사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일 듯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는 무형한 것임에도 때때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합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와 관계의 복합성은 공동체를 이끌어내고,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 규범, 문화와 같은 것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파되어 오지 않았을까요. 그 신의 성장은 결국 그 공동체의 성장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개인의 희생만 요구한다 해서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신과 인간은 함께 성장하여야 합니다. 신은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개신교가 성장한 것도 결국은 개신교의 커뮤니티가 성장할 수 있도록, 크리스트교 교리의 방향이 약간 틀어진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크게는 '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던 동양의 정치 사상들이나, 작게는 항상 사람들을 대함에 겸손하고, 진실되게, 성실하게 대해야 한다는 삶의
원칙들이 모두 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개인에 치우치지도, 공동체에 치우치지도 않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관계가 이상적인 관계일
듯 싶습니다.
따라서, 신을 두려워하고, 섬긴다는 것이 축자적인 의미로 단지 그가 믿는 '신의 테두리'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잘못입니다. 수많은 배타적 종교들의 폐단이 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며, 분란을 일으켜 결국 신 자신의 영역조차 줄여버리지 않았던가요.
예수는 죽기 전날 밤,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고 합니다. 종교를 막론하고 적어도 사람과 관련하여, 궁극의 신의 뜻이란 결국 사람들 앞에 겸손하고,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종교에서 시작한 논의이건, 정의가 무엇인가에서 시작한 논의이건, 그냥 일상에서 시작한 논의이건, 사실 그 궁극이 같은 것이 그런 이유일 터입니다.
'Tea Time 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년째 초보 바둑 일기 (0) | 2018.11.19 |
---|---|
지음(知音) (0) | 2018.11.03 |
테세우스의 배 (0) | 2018.10.28 |
변주곡 (0) | 2018.10.15 |
내 인생의 풍경화 (2) | 2018.10.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