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ea Time Talk

신은 사람 가운데에 있다

by 연학 2016. 10. 1.

신은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Deus inter homines habitat.


항상 마음에 품고 사는 말이지만, 또 뭔가 설명하려면 쉽지 않은 말입니다. 그래도 그냥 오늘 밤엔 이런 이야기로 차나 한 잔 하는 건 어떨까 싶어서 화두를 꺼내 봅니다. 평소에 남들과 굳이 신이며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 할 일은 없다보니, 결국 한적한 주말 밤시간에 몇 자 남기는 글들이 이 쪽 주제들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15년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즈음에는 관심도 관심인지라, 종종 꺼내어 읽던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눈에 와닿았습니다. 예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저 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가르쳐 주자, 두 제자가 예수를 따라갑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Rabbi, ubi habitas?)"


신에게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해 주는 듯한 이 문장이 참 오랫동안 머리에서 맴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말이죠. 하늘에 있는가, 땅에 있는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그에 앞서, 있기는 한가. 신이 있다면, 혹은 없다면, 이제는 우째 살아야 하는가. 뭐 딱히 누구에게 물어 보았다고 마음이 시원해 지는 질문도 아니고, 그야말로 '깨닫지 못하면' 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역사의 수많은 현인들이 질문하였고, 또 답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많은 좋은 글과 말을 접하며 답을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러니 돈을 많이 못벌었..) 사실 이런 류의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이 있게 마련인 것 같고,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보통 그들이 이룰 수 없는 그 모양새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라면 신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고, 요즘은 결국 태양과 은하계를 다루며, 매우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 것입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는 또 우리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것의 일부가 또 인간의 세계로 넘어올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쩌면 인간이 모든 수단을 써서 도달할 수 있는 곳보다 딱 1미터 위에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에 "신의 뜻" 혹은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지요. 매우 과격한 표현으로, 신이 필요했기에,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단순히 '전지전능'을 넘어선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신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서양, 특히 유럽에서는 이런 류의 대화에 비교적 관대합니다. 최근에도 그런 책이 있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대화는 한 20년쯤의 책입니다. 한국어판 제목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In cosa crede chi non crede?)"로, "장미의 전쟁"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와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라는 밀라노 추기경이 한 잡지에서 공개 서한을 통해 서로에게 주고 받은 질문과 답변을 펴낸 책입니다. 무신론 관점에서 크리스트교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마르티니 추기경이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실 국내에서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KBS의 '논어' 공개 강연에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함으로써 이런 류의 대화 시도가 있었기도 했죠.

 

이 대담 서신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마르티니 추기경이 에코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비신자는 어디에서 '선'의 빛을 찾는가"하고 말이죠. 신이 있을 때에야, 신의 가르침만 따르면 선을 행하는 것이겠지만, 신이 없다면 무엇을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죠. 에코는 이에 '타자가 등장할 때 윤리가 생긴다'고 답변합니다.


"우리는 타자의 시선과 응답이 없으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살인하고 강간하고 모욕하고 도둑질하는 사람도 예외적인 때에만 그런 짓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남에게 칭찬과 사랑과 존경을 구걸합니다."  (에코, P.106)


타인이 없으면 당연히 '선악'의 근거가 사라지겠습니다. 혼자 사는 데 뭘 하건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역지사지, 기소불욕물시어인과 같은 공자의 가르침도 사실 자유와 권리의 한계에 대한 민주주의의 원리와 같으며, 또 결국 우리 선한 행동을 규정하는 근거가 될 법합니다. 그런데, 사실 뭔가 좀 부족하긴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도올의 강의에서 나눈 대화는 이 부족함을 메워주는 듯 합니다. 김 추기경은 '공자의 모든 가르침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최상의 덕으로 '인(仁)'을 내세웠는데, "측은지심"으로서의 "인"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애인(愛人)'이라고 설명합니다. 공자가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인간완성의 경지로 보았듯,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크리스트교의 인간관이 유교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자기를 위해 시작한 여정이 결국 남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타적 사랑이 결국 신을 이해하는 한 방향이 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제가 좋아하는 이 구절은 예수가 붙잡혀 죽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계명"이며, 크리스트교와 유대교를 구분짓는 크리스트교의 본질을 명시합니다. '타인에 대한 희생과 사랑'이 바로 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장 핵심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는 수많은 그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 테마로 잘 먹고 잘 살고는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보십시오, 이제 신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고,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요한묵시록 21:3)"라고 말합니다. 신은 먼 하늘보다는, 바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내가 참여하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이 내용이 과연, 비신자라 하여 달라질 것은 없겠습니다. 결국 모든 가치는 인간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장 궁극도 결국 인간으로 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일 듯 합니다. 그리 보면, 신은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 특히 사람과 사람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매우 단순하지만, 참 많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 많이 사랑하고 살기가 그렇게 쉽고도 어려운 길이네요. (아직 저의 수행은 참 부족합니다.)


'Tea Time Tal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치 꿈을 이루기  (0) 2016.11.26
안수정등... 아 달다!  (2) 2016.10.01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0) 2016.09.18
다반사 (茶飯事)  (0) 2016.09.10
호칭기도  (0) 2016.09.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