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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 Time Talk

안수정등... 아 달다!

by 연학 2016. 10. 1.

안수정등(岸樹井藤)... 아 달다!


해인사 안수정등도

이야기는 안수정등이라는 불가의 비유에서 시작합니다. 아래의 법문이 주된 내용입니다.[각주:1]

한 나그네가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무서운 코끼리가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그네는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언덕 밑에 우물을 발견하고, 그 아래로 늘어진 등나무 넝쿨을 따라 내려가 코끼리를 피했다. 그러나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毒龍)이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우물 중턱에는 4마리의 뱀이 있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아 중간에 매달려 있는데, 두 팔은 점점 더 아파왔다. 이 때,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기 시작했으며, 들불까지 일어 위태로움을 더했다. 이래 저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두 방울 흘러 이를 마실 수 있었다.

우리네 인생(나그네)이라는 것이,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해 방황(광야)하다가, 허무함에 쫓기는 삶인데(코끼리), 그 와중에 이 세상의 생사(우물)라는 것은, 결국 죽음(독룡)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온 몸을 의지하는 등나무 가지조차, 낮과 밤의 흐름에(흰쥐와 검은 쥐) 점차 사라져 갑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참 요망하고 우스워서, 그 삶이 주는 약간의 쾌락(꿀물)에 집착하여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려 합니다. 그 움직임으로 본인이 우물 바닥에 빠져 용에게 먹힐 판인데도요.


이런 상황의 나그네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나시겠습니까?


일제 시대 스님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용성 스님이란 분이 제자들에게 안수정등 이야기로 화두를 삼아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해 보라 하였는데, 만공이라는 스님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고 대답하였고, 보월 스님이라는 분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 라고 하였으며, 전강이라는 스님은 "달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부질없으면서도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실존은, 그 공포 속에서 일순의 쾌락에 집착합니다만, 그것이 결국 삶의 본질을 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알베르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언급한 '부조리한 삶'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든 인생의 메시지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입니다. 이 상황의 타파를 위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옵션으로 까뮈는 제시하는 것은 스스로 삶을 끊어버리거나 상황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도취'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자살이나 현실 직시, 혹은 해탈이 그리 쉬운 방법이 아니고 보면, 결국 대다수의 인간이 택할 방법은 그냥 취해버리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보들레르가 다음과 같이 넋두리 하듯 말입니다.

항상 취해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 있다. 그것만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양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런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쉬지 않고 취해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詩든, 德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각주:2]

이를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실 분이 있겠으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조차 이미 그 무엇인가에 '도취'된 것은 아닐까요? 예컨대 기독교인이라면 "너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겠다"는 그 "주님의 말씀"에 도취된 것은 아닐런지요굳이 술이며 삶이 주는 쾌락에 국한한 것은 아니고, 그게 공부가 되었든, 자동차가 되었든, 취미가 되었든, 일이든, 빠져서 살라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일상이 힘겨워질 때, 더 나아가 삶이 지겨워질 때, 그 남은 시간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만큼 좌절스러운 것도 없을 겁니다. 이럴 때 무언가에라도 빠져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일지요.


물론 그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지옥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만, 그걸 먼저 깨닫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습니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 나는 잠들어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잠들어 있는 걸까? 내일 깨어나면 나는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 걸까? 내 친구 에스트라 공과 함께, 이 자리에에서 밤이 오도록 고도를 기다린 걸 생각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과 같이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얘기를 한 걸 생각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을 보며) 저 친구는 아무 것도 모르겠지. 얻어맞은 얘기나 또 할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밑에서는 일꾼들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할테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 가는데,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자는 잠들어 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 두자고.'"[각주:3]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자신들을 이 이상한 상황에서 구해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할 뿐'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게 될 지는 전혀 모르고, 단지 지금의 문제들이 고도가 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만 생각합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그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고도를 기다립니다만, 연극의 끝까지 고도는 결국 오지 않습니다. 워낙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 고도는 오지도 않을 것 같자, 이 둘은 결국 자살이라고 해 보려고 나무에 목을 메려 하지만, 그마저도 수월치 않습니다. 블라디미르는 결국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슬퍼하지만, 또 나무에 새싹이 돋는 모습으로 에스트라공과 또 하루를 살아보려 가며 극이 마무리가 됩니다.


신이 온다고, 또는 행복한 미래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끝없는 자기 암시와 도취의 행위들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신이 안온다고 해서, 꿈이 상실되었다 해서 또한 그리 절망할 것도 없지 않았었을까요. 인생이라는 게 애시당초 꿈을 꾸었다 깼다 하는 과정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상황을 다 알아버렸을 때는 참으로 무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다시 묻습니다. "어쩔 거냐고." 안수정등화와 관련된 수많은 대화는 사실 인류의 대화이며, 우리 각자가 스스로 삶의 마지막 순간, 신이건, 우리의 자손들에게건, 우리 자신에게건 그 답을 제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40년 삶의 제 대답은요? "슬픈 일이네요. 아. 네." 선승들이 하신 말처럼, "깨치지 못한 놈이 말은 무엇하겠습니까?"  




  1. 안수(岸樹) 즉 '강기슭의 나무'란 본래 대반열반경 1권에서 "이 몸은 마치 험준한 강기슭에 위태롭게 서 있는 큰 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쉽다.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정등(井藤) 즉, 우물안의 등나무라는 표현의 첫 출처는 두 군데라고 한다. 한 군데는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 爲優陀延王說法經)이라는 경전으로, 우타연왕에게 빈두로돌라사 존자가 설법한 내용에서 비롯한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이를 압축한 기록으로서의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이라고 한다. "안수정등"이라는 말이 최초로 쓰이기는 중국의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裝)의 전기(傳記)인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 법사전)이라고 한다. 유가에서도 이 설화를 이야기 하며 "이서설등(두 마리 쥐가 등나무를 갉아먹음)"이라는 4자성어가 있다고한다. 설화를 바탕으로 중국의 선가에서 "두 마리 쥐가 등나무를 침범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화두를 던지며, 이 비유의 메시지를 총체적으로 묻는다. 이를 안수정등화(岸樹井藤話)라고 한단다. [본문으로]
  2. Chareles Baudelaire, "Les Fleurs du Mal(악의 꽃)"中 "L'ivresse(도취)" Il faut etre toujours ivre. Tout est la : c'est l'unique question pour ne pas sentir l'horrible fardeau du Temps qui brise vos epaules et vous penche vers la terre, il faut vous enivrer sans treve. Mais de quoi? De vin, de poesie ou de vertu, a votre guise.  ... "Il est l'heure de s'enivrer! Pour n'etre pas les esclaves martyrises de Temps, enivrez-vous; enivrez-vous sans cesse! De vin, de poesie ou de vertu, a votre guise." [본문으로]
  3. Samuel Beckett, "En Attendant Godot(고도를 기다리며)" 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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