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外 인생영화 2편
예나 지금이나, 흘러가는 시간은 참 많은 생각과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나이 듦이라는 것은 서글픈 듯 하면서도, 또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법도 하고, 종종은 웃음 지을 일도 뒤섞여 있습니다. 특히 제게는 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꽤나 감정 북받쳐 오르게 하는 무엇이었던 듯 싶습니다. 지금에야 담담해졌지만, 예전에는 특히 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의 인생 영화 목록에는 시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네요.
1.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8)
지금까지의 제일은 이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했다지만, 실제로는 설정만 유사할 뿐이고, 내용은 '막스 티볼리의 고백'이라는 소설과 유사하다고 하네요. 80 노인으로 태어난 아기가, 자라면서 점점 몸이 젊어지면서 겪는 삶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주인공 벤자민은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사는 곳인 양로원에서 점차 자라서, 예인선에 몸을 싣고 세계를 항해하며, 어릴 적 짝사랑이었던 무용수와 결혼하고, 점차 나이들어 사랑하는 부인의 품에서 아기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다루어지는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도 한 땀 한 땀 의미있는 데다,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가 돌아와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까지 하나 버릴 것 없는 영화가 되겠습니다. 세상에 사는 그 무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크지요.
이 영화를 마무리 하는 독백인 "누군가는 강가에 앉으려고 태어나고, 누군가는 번개를 맞고, 누군가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누군가는 예술가이고,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버튼을 만들고,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누군가는 그냥 엄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에서는 긴 러닝 타임 동안 모아온 감정이 한 번에 '팍' 하고 터지는 느낌마저 듭니다.
2. Before 3부작 (Before Sunrise(1995), Before Sunset(2004), Before Midnight(2013))
매번 다음에 후속편이 나올 지 몰랐기 때문에 매 엔딩이 극적이라 느꼈던 작품들입니다. 제 입장에서의 절정은 2004년 Before Sunset일 듯 합니다. 내용은 짧지만, 앞과 뒤를 이어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을 뿐더러, 시간과 인생의 흐름에 대해 더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90년대 중반,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미국인 제시와 프랑스인 셀린이 만납니다. 단순히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밤새도록 거리를 다니며 대화를 나눕니다. 태양이 뜨고 셀린은 다시 파리로 가는 기차에 오르며, 연락처를 서로 남기지 말고 6개월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과 함께 헤어지게 됩니다. (Before Sunrise)
1996년 한국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젊은이들 사이에 당시 유행이 일기 시작했던 유럽 철도 배낭여행붐과 함께 여행의 환상을 증폭시켰습니다. 저도 혹시나 열차에서 멋진 인연을 만날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여행을 다녔었던 것 같네요. 이 때만 해도, 단지 삶에 대해서 솔직한 이야기를 이렇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했었지요. 대형회전관람차 위에서의 키스신 때문에, 국내놀이공원의 회전관람차가 덩달아 인기였었습니다.
젊은이의 객기로 어정쩡하게 헤어진 그 둘이 어떻게 되었을까는, 결국 10년이 지나 다시 영화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인생의 큰 교훈은 이 영화 시작에서부터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능할 때 연락처는 꼭 주고 받아야 한다. 셀린은 할머니의 부고로 6개월 뒤 그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고, 약속을 지켰던 제시는 비엔나에서 일주일을 기다리고 맙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됩니다. 다만 유럽에서의 추억을 책으로 써내 인기 작가가 됩니다. 프랑스에 출판 홍보 투어를 온 도중, 출판기념회 광고를 보고 찾아온 셀린과 재회를 하고, 비행기 출발 전까지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간 지내온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시간이 갈 수록 셀린을 떠나고 싶지 않아진 제시는 급기야 셀린의 아파트까지 찾아가게 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셀린의 노래를 듣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셀린은 제시에게 "너 이러다 비행기 놓쳐"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나죠.
비슷한 시기에 파리에서 시간을 보낸 데다, 90년대에 20대를 보내고, 2000년대에 30대를 맞은 저로선 인생을 함께하는 친구들의 연애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듯 격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비포 선라이즈 엔딩과 마찬가지로, 비포 선셋도 결말은 매우 크게 열려서 끝이 났습니다만, 20대의 느낌처럼 심하게 궁금하기 보다는 "제시가 비행기를 탔건 안탔건" 그냥 그게 인생이라는 식으로 오픈 마인드가 되어 있는 제 자신에게 좀 놀랐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결말 자체가 도리어 마음에 들었고요.
그리고 그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10년이 더 지나서 밝혀집니다. 결국 그 날 밤 사고를 친 제시와 셀린. 셀린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제시는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부인과 결별합니다. 둘은 프랑스에서 쌍둥이를 키우며 생활하고, 미국의 아들은 방학 때마다 아빠와 함께 생활하러 놀러옵니다. 가족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고, 둘만 대화를 나누어왔던 전편들과 달리, 여행지의 호스트 가족들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티격태격하고 다시 화해하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으로 훈훈하게 영화는 마무리 하게 됩니다.
두 배우가 20년에 걸쳐서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이다보니, 이 영화를 볼 때는 매번 오랜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느낌입니다. 시간을 느끼게 함에 있어, 배우들과 삶을 같이 하는 영화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나 싶습니다.
3. 씨네마 천국 (Cinema Paradiso, 1988)
성장기에 대한 영화로, 우리 세대에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인 듯 싶습니다. 시칠리아 작은 마을 영화관 상영기사와 동네 어린이 토토의 우정과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추억을 다룬 영화로, 그 OST 음악들은 아직도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국내 들어올 때 편집본에서 극적 효과를 위해, 어른이 된 토토가 첫사랑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이후에 감독판으로 재개봉되어 그 뒷이야기까지 다시 상세히 소개 되었습니다. 결론은 심플하게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었지요. 1
사춘기 시절에 봐서 그랬을까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안고 오랜 시간을 살아 나이가 든다는 것이 그 때의 가슴에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알프레도가 남긴 한 편의 영화가, 어린 시절 한 장 두 장 몰래 빼가던 삭제된 애정신의 연결이었던 것을 알게 된 순간, 쓰나미처럼 향수가 밀려오면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그 때의 사람들 대한 그리움과, 그 과거가 만들어낸 현재가 얽혀 차갑고 뜨거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분일 듯 합니다.
이 외에도, 홀랜드 오퍼스(1995), 마지막 황제(1987)와 같은 영화들이 마음 속에 오래 남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이들 영화들은 결국 삶을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면서, 영화 전반에 걸친 약간의 지루함을 마지막 순간에 큰 감동으로 확 끌어올리는 맛이 있습니다. 그 전에 보여주는 모든 지루함은 마지막을 위한 준비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크건 작건, 한 사람의 삶과 죽음 전체를 조망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해지고, 좋고 나쁨과 같은 하나의 단순한 기준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오묘함을 느끼게 되는 듯 합니다.
- 피천득, '인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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