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단상
어린 시절 이백과 두보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난 그래도 이백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했었습니다. 좀 즉흥적인 면도 강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은 표현들이 엣지있게 느껴질 적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한 20년 정도 지나서 돌이켜 보면, 말을 던지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글을 쓰기는 꽤나 어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말을 할 때는 청자와 나 사이에 함께 하는 지식이나 공감의 정도를 어느 정도 기본으로 알고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에 비해, 실제 글을 쓸 때는 독자들간의 다양한 성향을 맞추어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제 글 실력이 나빴다는 겁니다. 떠오르는 단상은 하루에도 수십가지인데, 그것을 어떻게 잘 정리해야 할 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일도 다반사이지만, 그렇다고 한 두개 아이디어로 뭔가 써내려가기에는 지식이나 생각을 깊이 정리할 힘이나 시간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글을 쓸 때에는 한 단계, 두 단계, 세 단계 정도를 거쳐서 생각을 묵혀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것도 시간이 많을 때의 일)
요새 블로그랍시고 만들어 놓고 포스팅을 한 달에 하나 올리지도 못하는 터라, 새로 뭔가를 쓰지 못할 때에는 옛날에 썼던 것들을 좀 예쁘게 정리해서 올려볼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 10년쯤 전에 썼던 글을 리포스팅합니다.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담그고, 그것으로 다시 증류주를 만드는 과정이 어쩌면 제가 글을 쓰는 과정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요새는 스마트기기가 많이 좋아져서 여러가지 단상을 여러가지 기기에 잘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들으며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곤 하는데,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쉽지 않았었지요. 오랜만에 보아도, 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네요. 담근지 10년 된 술 한 잔 함께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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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를 심고,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즙을 짜내어
발효하고, 포도주를 담근다.
여러 포도주를 섞어 샴페인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지방에선, 와인을 끓여 증류시켜 꼬냑을
만든다.
그것도 단순한 증류가 아니라, 20-30년된
옛술과,
새로 끓인 신주를 섞어야 한다.
글을 쓰거나, 뭔가 내 생각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그와 같다.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어딘가에 뿌리고,
때가 되면, 그에 대해 반추하고 수확한다.
또는 항시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을 메모처럼
수확하기도 한다.
이를 짜내어 첫번째 흔적을 담고,
이를 다시 읽어 발효시켜, 첫번째 술을 담근다.
어떤 것은 그 자체로 잘 보관시켜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 재차 음미하게 되고,
어떤 것은 다시 한 번 정수를 뽑아, 다른
산물로 진하게 음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시 '클래식'이라 불리는 것들과 함께
섞여 나만의 진한 향을 갖추게 된다.
어떤 것은 서로 다른 조각들을 블렌딩하여 새로운
글로 남기게 되기도 한다.
어떤 해의 내 생각들은 좋은 작황이고,
어떤 해의 내 생각들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포도주를 담건, 꼬냑을 만들건, 모두 쓸모가
있었으면 한다.
어떤 해의 생각은 내 지향과도 모순되기도
하지만,
매일매일의 자책과 실망, 우울이 가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생각의 포도송이 조차도 제대로 모아
소중히 해보고 싶다.
한 쪽에선 좋은 품질의 포도주를 만드는 노력을
들이면서도 동시에,
내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술의 성격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보고 싶은 것이다.
(2006.11.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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