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생 수업 : 본질에 대하여
사물의 본질(essence)에 대한 질문은, 대학교 1학년 쯤 시작된 것 같습니다. 특정 현상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분 짓는 그 '무엇'이 무엇인가가 매우 궁금했습니다. 때늦은 사춘기적 감성으로 접근하자면, '어린 시절의 순수한 자아'가 어른이 되어가며 세파에 점차 때묻어 감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질문의 시작이었습니다. 도대체 순수한 나를 찾는다 하는데, 그 '순수한 나'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죠.
한참 이런 류의 고민에 빠져 있을 때쯤, 유럽에 배낭 여행을 떠났고, 무슨 만행을 떠난 스님처럼 여기저기 다니며 '깨달음'을 찾아다녔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산을 봐도, 강을 봐도, 길을 걸어도, 밥을 먹으며 질문에 대한 답만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쯤에 퐁피두 미술관 한 코너에서 아래의 작품을 만났습니다. 작품명은 "하나와 세 개의 의자"입니다. 그 쯤에 어디선가 "유럽 미술관에는 워낙 기이한 것이 많아 때로는 코너의 소화기도 작품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였는데, 작품 제목은 세 개의 의자라면서 진짜 의자 하나와 사진 한 장 밖에 전시되지 않아 '나머지는 누가 작품인 줄 모르고 가져갔군' 하며 혼자 속웃음을 짓고 있었죠. 그런데 그 옆에 걸린 캔버스에 "chair"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아차 하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실재하는 의자, 이미지로서의 의자 말고도, 언어, 혹은 '관념'으로서의 의자가 있었던 것인데, 저는 눈에 보이는 것만 찾고 있던 겁니다.
Joseph Kosuth, one and three chairs(1965, 퐁피두 미술관 재현), from internet.
나중에 알고 보니, Joseph Kosuth라는 20세기 개념주의(Conceptualism)의 대표적 작가 작품이었더군요. (유럽에서 미술 보는 재미는 이런 데 있습니다. 그냥 길가다가 대가의 작품을 마주칩니다.) 작품은 질문합니다. '이 중에 무엇이 진짜인가?' '바로 여기에 있는 대상'은 우리가 그걸 '보고 느끼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의자는 이러한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통나무나 진배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지나 관념 모두, 실재로서의 의자가 없다면 허구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실체와 함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미지와, 개념(혹은 관념)은 모두 중요합니다. 철학사를 보면, 철학자는 보통 이 세가지 요소 중에 하나에 더 비중을 두고 자신만의 사고를 발전시켰던 것 같습니다. 존재론, 인식론, 관념론, 실존주의... 하지만, 어느 한 쪽에서의 관찰에 불과할 뿐, 전체를 다 아우를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오죽하면 작품명이 '하나이자 세 개인 의자(one and three chairs)'였을까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떠올리게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무엇인가의 본질은 감각과 이성을 모두 초월한 문제로 올라갈 듯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종종 아래와 같은 장면을 마음에 떠올리곤 합니다.
Wriggles & Robins: Life Drawing at The Book Club (still _ 동영상 링크)
미술실에는 조각상 혹은 모델이 서 있고, 사람들은 이젤을 놓고 빙 둘러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대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대상은 '바로 이곳'에 있죠.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 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리는 그림은 모두 다 다른 그림입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모두가 달라지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 모두 대상을 향해 있고, 대상을 똑바로 그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심하게는 대상의 본질을 그렸다고 자신만만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정말로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결국은 미술실에서 모델을 그리는 것과 다를 바 없겠습니다. 단순히 이미지에만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관념이며 실체에 대해서도, 결국 우리가 알게 되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체의 한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살면서 대상 하나에 좀 더 집중한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것 역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건 느끼는 것이건 결국은 한 장의 그림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합한다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저 미술실에서 모델을 둘러가며 그린 초상화를 모아보면, 대략 모델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 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기업체의 360도 인사평가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본질은 그렇게 대상으로부터 얻어진 모든 이미지 혹은 관념의 총합(L'essence est la somme des images.)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대상의 무한한 이미지를 전부 얻어낼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그가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블랙 스완'이 나타날 지 모릅니다. 아무리 모든 이미지를 다 합쳐서 본질을 재구성해 낸다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여전히 '빈 공간'을 남겨둘 수 밖에 없을 겁니다.( 1빅데이터는 이런 간극을 메워 줄까요? 또, 그렇게 알아낸 모든 데이터로 결국 모든 대상의 본질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돌고 돌아온 결론, 결국은 겸손해야 하겠네요. 궁극에선 사람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 대학교 1학년, 이 말을 만들어냈다고 얼마나 스스로 좋아했던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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