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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 Time Talk

두 여자의 축구

by 연학 2017. 10. 12.

두 여자의 축구


저희 집의 두 여자, 아내와 딸은 이제 명실상부한 축구팬입니다. 응원하는 팀은 FC서울이고요. 지난 3년 동안, 1년에 적어도 다섯 경기 이상씩은 경기장을 직접 찾아 응원을 하고, 팀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고, 차를 타고 가며 한 시간 씩이나 축구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경기장을 찾는 날에는 전날부터 가방에 유니폼과 응원도구를 챙겨두기도 합니다.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이런 류의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경우들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저는 복 받은 남자입니다. 사실, 저도 가족과 함께 경기장에 가기 전에는 마음만 있었지, 실제 가보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을 가기 위해 어디서 표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 지도 몰랐었으니까요. 


축구팬이 되고 싶었음에도, 주변에 그렇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함께 경기장에 가볼 일이 없었네요. 게다가 90년대가 되었을 땐 서울에 연고를 가진 팀도 없어서, 정을 붙이고 일부러 찾아볼 일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니까요. 그런데 2002년의 월드컵을 지나면서 K리그에 관심을 갖자는 움직임과 함께, 서울 연고 축구팀 창단을 위한 서명운동이 있었죠. 2004년이 되어서야 논란 끝에 안양LG가 서울로 연고를 다시 이전하여 올라오게 됩니다. 지금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 있죠. 


관심은 그 때부터 갖고, 꼭 한 번 경기장을 가리라 마음만 먹었는데, 유학에, 취직에, 결혼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 기회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자, 다시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FC서울과 수원삼성이 맞붙는 "슈퍼매치"에는 4~5만에 달하는 팬들이 축구장을 찾는데, 이는 국대 응원의 열기를 넘는다.


2015년 9월 19일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던 서울과 수원의 슈퍼매치날이었습니다. 슈퍼매치는 서울 연고 이전 이후 워낙 서포터간의 대립각이 심했던 서울과 수원의 경기로, 나름 "연고전"이나 "한일전"에 비견할 만한 경기였기에 일단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경기였습니다. 일단 경기장에 사람들이 가득해야 어쨌건 좀 볼 맛이 나지요. 그래서 이 때는 큰 맘을 먹고 입장권을 샀습니다. 서울 경기장처럼 홈도 아니어서, 원정 응원석 하나만 사야 했기에 어디서 앉아 보아야 하는 지 고민도 없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홈경기여서 "좋은 자리에서 본답시고" 지정석에서 봤다면, 그 이후에는 다시 안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아는 축구 선수가 차두리, 박주영 정도였던 터라, 이 선수들이 출전하여 흥미를 더했습니다. 여기에 3:1로 이기기까지 했으니, 우선 여러가지로 신이 났지요. 서포터 석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부분이나, 경기 후에 서포터들끼리 세레모니를 하는 것이 "연대나 고대 출신이 아닌" 저나 와이프에게는 꽤나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경기는 "가장 잘하는 팀의 경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팀'의 경기"인 것 같습니다.


아내를 열광시킨 차두리의 골 세리머니


경기장에서의 경험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하일라이트 영상' 등으로 복기 되었습니다. 함께 열광하고 흥분했던 장면들을 다시 보면서 기억을 다시 되새김질 할 기회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안되어, 홈경기 관람을 위해 우리 가족은 다시 상암을 찾았고, 결과는 다시 승리. 거기에 2015년에는 FC 서울이 연말 FA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우승컵을 거머쥐었는데, 그 자리에도 함께 하면서 세레모니를 만끽했습니다. 확실히 타이밍이 좋았던 것인데, 저희가 9월에 처음으로 경기를 보러가기 시작한 즈음부터 경기력이 좋아진 FC 서울이 후반부에 계속하여 호성적을 거두었고, 그것이 가족들의 축구 경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2016년에 와서 FC 서울은 그 전년도의 경기력 향상이 정점을 찍으며, 시즌초부터 1-2위를 다투는 팀이 되고, 여기에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와 FA 컵에서도 모두 훌륭한 스타트를 보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시즌권까지 끊어가며, 매우 열광적인 K리그팬으로 변모했습니다. 시즌 중간에 감독의 교체가 있었던 데에 다가, 전체적으로 시즌 후반으로 가며 뒷심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K 리그에서는 우승, FA 컵도 결승에서 아쉽게 승부차기 10-9로 준우승,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4강까지 진출하는 호실적을 거두었습니다.



이쯤에 오면서는 저보다 아내가 더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챙겨보지도 않는 K리그 프로그램에서부터 FC 서울 경기 일정이나 관련 소식은 훨씬 더 빠르게 알고, 집에서 함께 관전하기도 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의 대화 주제가 '축구, 군대'라는 농담도 있다지만, 저희 집에서는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듯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딸은 발표 주제로 축구를 선택했습니다. 동갑내기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터라, 딸이 남자아이들과 친해지는 데에도 축구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유치원에서 축구를 주제로 한 딸의 발표 자료 (부모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쉽게도 2017년의 시즌은 시작부터 삐걱거렸습니다. 아드리아노가 이적하고, 새로운 외국인 스쿼드가 제대로 영입되지 못한 데다, 황선홍 감독과의 사인도 맞지 않았죠. 개막전은 슈퍼매치였지만, 그 이후에는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딸은 가장 좋아하던 아드리아노가 중국팀으로 가버린 데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한동안 와이프는 축구장에 안가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도 상위권 팀과의 빅매치는 꼬박꼬박 챙겨서 경기장을 찾았고, 그 어려운 시즌에도 수원 원정에서의 슈퍼매치에서는 1:0 승리라는 짜릿한 쾌감을 맛보게 됩니다. 2018년 시즌에는 아시아챔피언스 리그도 못나가게 되었지만, 덕분에 올 시즌을 거치면서 아내는 스쿼드의 중요성을 느끼고, 선수 영입을 위한 "스토브리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풋볼매니저 같은 게임을 아내에게 소개해 주는 건 어떨까도 하고 있지요.


2017년 가족이 관람한 유일한 승리 게임인 수원삼성과의 원정 경기.


야구나 다른 스포츠도 그렇겠지만, 축구에도 경기장 밖의 요소는 꽤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경기 시작 2시간 전부터 경기장에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러가지 푸드트럭이나 이벤트, 놀거리도 많고, 팬파크 같은 시설도 잘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고 서포터석에 앉아서 (혹은 두 시간 내내 서서) 우리 편을 응원하는 재미가 가장 큰 듯 합니다. 최근에는 일반응원석 쪽에서 구단의 주도로 야구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응원전을 유도하고 있습니다만, 전통은 역시 서포터석이 아닌가 합니다. 응원석 밖에서 본 결과로도 역시 서포터 석의 열기를 일반석이 따라가지를 못하더군요. 하프타임에 열리는 경품 이벤트나 응원불빛 이벤트도 버릴 수 없는 소소한 직관의 요소입니다.


FC 서울의 Half Time에 진행되는 관중석의 "걱정 말아요 그대" 이벤트


모두가 K리그의 팬이 된 이후, 우리 가족에게는 확실히 하나의 공감대가 더 생겼고, 대화 소재도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있는 국가대표의 TV 시청도 더 재미있게 즐기고 있습니다. 아빠로서는 딸에게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더 알려준 것 같아 뿌듯합니다. 또,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딸에게 매순간 최선을 다하기, 승부에 임하는 자세와 같이 삶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경기장을 찾는 것은 가족들과 함께 하기에 좋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아빠들이 그 시작을 약간 스마트하게(?) 이끌어 줄 필요는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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